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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터어키

터어키 여행(이스탄불-카파도키아-안탈랴-파묵깔레-쿠사다시) (2008년11월8일 6박8일)

by 지너비 2008.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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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자:2008년 11월 8일(토)~11월 15일(토) 6박 8일

여행지    : 터어키 (인천-이스탄불(1)-카파도키아(1)-안탈랴(1)-파묵깔레(1)- 쿠사다시(1)-

                                     이스탄불(1) -기내-인천.

 

11/8일 16:00분경 TK091 탑승후 인천출발 ~이스탄불 21:10경 도착(12시간 10분 소요, 기내식 2회)

         (시차 - 7시간)

 

국토의 97%가 아나톨리아 반도로 서남 아시아에 속해 있고 3%는 유럽 대륙의

동남부 트라키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 두 대륙을 잇는 도시로 동서 문화의 접점이 되고 있다. 정식 국명은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로마시대와 기독교 문화를 거쳐 오스만 투르크와 이슬람의 문화를 지낸 곳으로

 국토 곳곳의 수많은 역사 유적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다는 이유로 유럽에서는 동양 처럼, 동양에서는

유럽 처럼 인식되기도 하며 선진국의 유럽에 비해 여러가지 면에서 뒤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북쪽으로 흑해, 동쪽으로 그루이야, 아르메니아, 이란이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이라크, 시리아,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6.25 파병을 통해 '형제의 나라'로 칭해지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수도 : 앙카라
인구 : 6,900만명
면적 : 788,695
주요민족 : 터키인88, 쿠르드족10-20, 아랍인1.5, 기타0.3%로 구성된다.
주요언어 : 공용어는 터키어이며 시골이나 동남부 이주민들 사이에서는 쿠르드

                     언어도 사용된다.
종교 :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스탄불 첫째날과 마지막에 머물렀던 호텔

 

 

호텔에서 카이세리로 이동중 가정집 및 아파트 발코니등 여러곳에 많은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카이세리 주변 전경

 

 

 

카파토키아 소개

 

괴레메 야외 박물관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버섯 모양의 집들과 이를 이용한 교회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괴뢰메 야외 박물관이라 불린다.

 원래는 수도생활을 할 목적으로 동굴을 파고 들어가 기도와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으며 점점 규모가 커졌으며 벽화나 여러가지 상징적인 그림과 무늬들도 나타났다.
암굴교회라 불리는 이곳의 교회들은 애초의 목적인 수도외 기도를 위해 출입구와 통풍,

자연광을 위한 작은 창문 정도를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맨 처음에는 1 365일을 뜻하는365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그보다 적고 관광객에게는 약 30여개가 개방되고 있다.
몇개의 유명한 교회들이 있는데 괴뢰메에서 가장 크고

 벽에 프레스코 벽화가 가장 잘 보존된 '토칼르 교회'와 수도원 시설을 비교적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카란륵 교회'등이 있다.

그 외에도 성 바르바라 교회, 뱀이 있는 교회, 차르클루 교회등이 있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

 

 

 

 

 

 

 

 이 곳에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터널을 만들어 살았으나 부식작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벌집모양의 바위산이 만들어졌다.
이 곳의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의 생성 원인은 이 지역이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이루어진 곳에 다시 화산활동이 있어 그 위를 화산재들이 덮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과 부식작용으로 마모되고 부서져 약한 부분은 모두 깍여나가고 가장 단단한 암석들만 남아

 현재의 기기묘묘한 바위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수없이 뚫려 있는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이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다. 이 집들의 주인이었던 비둘기들은 이 곳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에겐 귀한 손님이었다.

성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인 알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곳 사람들은 비둘기 알에서 염료를 얻어 석굴예배당의 성화를 채색하였다.


   

 

 

  

로즈마리 계곡

 

 

 

 

 

 

파샤바계곡

젤베 계곡에 들어가서 바로전에 있는 개방된 공간이며,이곳의 페리바자는 머리가 3,4개로 나뉘어져 있어서

버섯과 같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버섯의 갓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은

딱딱한 현무암으로 아래의 부드러운 응회암과 침식 속도가 달라 생겨났다. 

 

 

 

 

 

 

 

 

 

기독교 박해를 피해 건설되었던 지하도시 카이막쿨러

 

 

 

 

 

 

카파도키아 CAVE RESTAURANT

 

 

 

 

 

터키의 전통식 항아리케밥(촙넵케밥) 

◈ "촙넵케밥이란?" ◈
케밥의 재료와 각종 야채, 버섯 등을 호리병 모양의 토기에 넣어 화덕에서 오랫동안 은근히 익힌 요리

 

 

 

 

 

메블라나 사원

종교도시 콘야로 이동하여 회교신비주의 창시자인 메블라나 사원관광

 

 

 

 메블라나 사원관광

 

 

 

 

지중해와 내륙을 갈라놓은 장엄한 타울로스 산맥을 지나면서 전망을 조망하며

소아시아 반도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터키의 대표적인 휴양지 안탈랴로 이동(약5시간 소요)

 

 

 

 

타울로스 산맥을 지나면서

 

 

 

 

 타울로스 산맥 휴게소 진열상품

 

 

 

 지중해 안탈라 호텔에서 바라본 바다풍경

 

 

 

 

 안탈라 구 시가지

 

 

 

 

 

안탈라에서 유람선 관광

 

 

 

 

 

 지중해 연안의 해수욕장이 보인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안탈라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3개의 아치와 4개의 고린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하드리안 문

 

 

 

 

 

 

파묵깔레 소개

 

파묵칼레는 목화솜으로 이루어진 성이란 뜻으로

도시는 온통 눈이 내린것 같이 새하얀 모습이다.

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리면서 층층이 바위를 지금의 하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역사적으로도 치유와 휴양을 위해 많은 위인들이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지나친 개발로 온천수가 줄어들어

터키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계획성을 갖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온천수가 흘러 나오는 지역 이외에도 곳곳에 고대 유적들이 들어서 있어

원형극장이나 신전등 당시의 건축물도 구경할 수 있다.
파묵칼레에서는 무엇보다도 온천욕과 목화성 같은 야외 온천이 가장 큰 볼거리다.

대부분의 서양 여행객들은 수영복을 준비해와 온천욕을 즐기지만

현지인들은 입던 옷 그대로 온천에 빠져든다.

온천수가 많이 줄어 수영장 처럼 깊지는 않지만 야외 온천,

그리고 새하얀 눈밭 같은 곳에서 즐기는 온천은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히에라 폴리스

석회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 기원전 1세기 페르가몬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서 도시로 세워졌다.

도시로 세워지기 전 이곳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제의적인 장소로 여겨졌고

일찍부터 이곳에는 성소가 있었다. '성스러운 도시'를 뜻하는 히에라 폴리스는

치료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로써 로마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번성했으나

14세기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직조업이 크게 발달하여 양털기술자, 카페트 직조자, 염색기술자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카페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새끼 양가죽으로 만든 가죽 옷 패션쇼 관람

 

 

 

 

 

 

쉬린제 마을로 가는 도중 터어키 시장에 들려서 석류 구입

 

 

 

 

 

쉬렌제 마을

셀축 시내에서 8km 정도 떨어진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로

마치 우리나라 1970년대의 농촌마을과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마을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람들이 몰리는 주요 관광지만 둘러보는

대부분의 터키 여행자들에게 산간에 살고 있는 평범한 터키 주민들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쉬린제 마을의 가옥들은 이곳이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살던 곳인지라 아직도 그리스 양식의 가옥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에 따라 실망도 할 수 있고 포근함을 느낄 수도 있는 관광지라고 보면 좋다.

 

 

 

 

 

 쉬린제 와인가게(보통 한 병에 10달러 체리,석류,복분자,복숭아 외 다수 과일 와인 판매)

 

 

 

 

 

에페소 소개

에페소는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도시 전체에 유물이 산재해 있다.

사실 에페소는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도시의 기원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과 문화가 이곳을 지나갔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유적 도시가 되었다.

 

에페소는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에서 에페소로 옮긴 덕에 많은 건축이 이루어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이후 아우구스트스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기원 후에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7세기 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 갔으며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의 에페소는 역사 유적과 건축, 기독교 성지순례를 하는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에게해의 한가로움과 지중해의 여유로움까지 즐길 수 있는 여행지다.

이스탄불이나 앙카라등 대도시에서 멀어 여행하기 쉽지는 않지만 도시 곳곳에 산재한 유적들과

한적함으로 점점 더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다.

 

에페소에서의 여행은 주로 유적지나 기독교 성지여행의 성격을 많이 띈다.

대부분의 유적이 시내나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어질 당시의 노천에 그대로 있어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다.

유적들은 기원전 후에 지어진 것이 많으며 부서지고 무너진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갖고 있다.

유적지 곳곳을 다니면서 성서에 나왔던 곳, 역사 책에 나왔던 곳등을 짚어가면 흥미로운 여행이 될 수 있다.
유적지를 따라 걷는 일이 많고 유적지는 흙이나 당시의 돌, 석재등을 이용한 바닥이 많으므로

발이 편한 신발을 신도록 한다. 또한 여름에 여행할 경우 무더운 한 낮시간은 피하는 게 좋다.


에페소가 있는 에게해, 지중해 지역은 햇살이 강한 편으로 모자나 선글라스 선크림등으로

 지나친 햇볕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도록 한다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 유적가운데

전면이 원형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차례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재건되었고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에페소는 사도바울이 서기 53년 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도바울의 방문 이후,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행전 19:9-10]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것으로 나와있어 이 셀수스 도서관이 바로

성경상의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은 이곳이 두란노 서원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지만 역사상으로

이 셀수스 도서관은 사도바울이 에페소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없는 추측일 뿐이며,

사도바울이 셀수스 도서관과 같이 도시 중심에 위치한 화려한 곳이 아닌 변두리에서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에서 강론했을 것이라는 것이 좀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에페소는 이곳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져 부흥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성지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스탄불 소개

 

터키 최대의 도시.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하였고,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지명인

이스탄불로 불리워지기까지 약 1600여 년 동안의 문화와 역사, 왕조의 흥망이 살아 숨쉬고 있다.

 

 초기 정착민인 그리스의 미케네인 Mycenaeans네 의해 형성된

비잔티움은 A.D305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재건되었다.

 

이후 오스만 Osman제국이 이곳을 점령하여 이슬람을 널리 포교하고 수도를 확대하여 이스탄불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 터키의 수도는 이스탄불이 아닌 앙카라 Ankara이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출범 하면서 초기 대통령인 아타투르크 Ataturk가 지나온 역사를 거울삼아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수세기를 걸쳐 이스탄불은 터키의 심장으로 남아 있으며 아름다움을 간직한 대도시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상업과 문화의 교류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으며,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스탄불은 골든 혼(Golden horn:Halic)하구를 경계로 신시가와 구시가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스크의 둥근 돔과 청탑이 모여 있는 구시가와 신시가의 고급 호텔, 송신타워 등은 대조를 이룬다.

 

 이스탄불에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쉬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

성 소피아 (아야소프야) 성당(현재 박물관),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등의

각 시대별 궁과 성당을 비롯해 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 미술관등이 큰 볼거리로 꼽힌다.

또한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션 시장 역시 관광객이 많은 곳이며

밤에는 배꼽 춤이라 불리는 발리 댄스를 관람할 것을 권한다.

 

 

톱카프 궁전 
17
세기 천하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세계 곳곳에서 거둬들인 진기한 보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헌상품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골든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의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궁전으로서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강대한 권력을 가졌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성이다.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에서 반 정도가 톱카프 궁전을 사용 했다고 한다.


궁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다.

의사당이나 술탄의 거실은 물론 왕실의 여인들이 거처했던 하렘은 더욱 흥미롭다.

2정원의 오른쪽에는 굴뚝이 딸린 큰 부엌이 자리잡고 있는데 천장이 돔으로 된 10개의 큰 방과 28개의 굴뚝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 했음을 알수 있다.


골든 혼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은 마치 한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그 장엄한 아름다움 외에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사상 최적의 요새임을 알수 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언덕 끝에 동서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포진해 놓았던 군사요지이다. 이때문에 "Top대포, Kap, Palace 궁전"에서 톱카프 궁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에는 4~6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던 만큼

궁전 자체가 하나의 마을 이었을 정도로 궁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아직도 궁전을 복구중으로 미공개된 부분이 많다. 현재 각종 유물과 보물은 4개의 방으로 나뉘어 전시 되고 있다.

총 몇점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따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궁전에만 하루 정도 투자하는 것이 좋다.
아야소피아 Ayasofya 성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곧게 뻗은 길 끝에 있는 궁전 입구인 '제국의 문'의 웅대함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제국의 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제 1정원이 나온다.

우측의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해 들어가면 바로 제 2정원의 잘 다듬어진 화단과 푸른 잔디가 있다.

정원을에워산 궁전 내부의 건물들은 각기 독특하고 오른쪽 끝에 또 다른 매표소가 있는 곳이 바로 하렘이다.

하렘은 독립된 박물관으로 취급되고 있으므로 별도의 티켓을 구입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지하궁전(예레바탄사라이)

혼잡한 술탄아흐메트 지역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밑으로 층계를 내려가면

섬득할 정도로 서늘하고 불가사의한 공간이 나타난다.

'예레Yere(땅에)', '바탄Batan(빠지다)'이라는 의미로 532년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지하 대 저수지이다.

 크기는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 정도로 336개의 코린트(Corinth)양식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으며

현재는 물을 저장하고 있지는 않다.


어두운 조명 아래 줄지어 선 기둥 사이를 걷다보면 위에서는 끊임없는 물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안쪽에는 메두사 Medusa의 머리가 옆으로 뉘어져 있다.

빛을 받아 드러난 얼굴은 요사스러운 느낌마저 감돈다.

그것을 본 사람은 곧 돌로 변하게 한다는 전설 때문에 가장 안쪽에 두고 숨겨놓은 듯하다.

복잡한 술탄 아흐메트 지역에서 기온이 30도가 넘는 한 여름에 이곳을 찾으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내부에는 카페도 두군데 있고 탁자와 의자도 마련되어있어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감상하며 터키의 전통차를 마시는 것도 좋다.

 

 

 

메두사 Medusa의 머리가 옆으로 뉘어져 있다. 빛을 받아 드러난 얼굴은 요사스러운 느낌마저 감돈다.

그것을 본 사람은 곧 돌로 변하게 한다는 전설 때문에 가장 안쪽에 두고 숨겨놓은 듯하다.


 

 

 

 

 

 

 

블루모스크

 

구시가의 지역 이름이기도 한 술탄 아흐메트는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지이며 '

블루 모스크'로 이름 난 모스크의 이름이기도 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내부의 푸른색의 타일과 어우러진 조명으로 블루 모스크란 애칭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블루 모스크는 술탄 아흐메트 1세가 1600년대 초에 세운 이슬람 사원으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결정사항이나 축제, 집회와 같은 행사들이 치뤄졌다.

 

모스크 내부는 푸른 색이 도는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의 타일로 장식 되었으며

특히 200개가 넘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스텐드글래스와 어우러져 내는 빛이 환상적이다.

이 빛이 반사하고 산란해 아름다운 푸른 빛을 만들어 블로 모스크란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블루 모스트의 돔은 직경 27.5m, 높이 43m나 되고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도 볼거리다.

가지각색의 빛갈과 무늬가 정성스럽게 짜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블루 모스크의 성스러운 초록 양탄자는 에디오피아에서 선사 받은 것이라 한다.

블루 모스크를 나오면 굉장히 넓은 술탄아흐케트 광장이 있다.

잘 조성된 평온한 이 광장은 여행객과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서쪽은 광장은 로마시대의 대 경기장 터였다.

 

 

 

 

 

 

 

그랜드바자르

15세기에 처음 나무로 지어진 이후 화재등으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이후 재건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건물 형식을 띠게 되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한마디로 이스탄불의 큰 시장으로 터키의 민족적 향기가 감도는 토산물 가게로 가득찬 쇼핑의 천국이다. 출입구만 해도 20개가 넘고 상점은 5천개가 넘을 지경이다.

남쪽은 베야짓, 서쪽은 이스탄불 대학, 동쪽은 술탄아흐메트와 접해 있고,

일단 들어가면 좀처럼 같은 출입구로 나오기 힘들다.

굉장히 작은 상점들이 무수하게 들어차 있지만 대부분 같은 품목끼리 몰려 있기 때문에 손쉽게 쇼핑할 수 있다.

옛부터 시장이었던 이곳은 내력있는 골동품 가게나 금은 세공점이 많다.

 

 

 

 

 

 

 밸리댄스

 

밸리댄스는 우리에게 배꼽춤으로 알려져 있는 터키고유의 춤으로

터키의 왕인 술탄에게 간택되기 위해 궁궐에 살던 궁녀들이 매력적으로 춤을 추던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복부와 힙의 움직임이 포인트로 신비로운 동작과 아름다운 의상으로 그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보스포러스해협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나누는 경계의 해협으로 양쪽으로 보이는 이스탄불의 정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해협 양쪽으로는 비잔틴 시대와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궁, 모스크, 귀족들의 별장등의 유적이 늘어서 있어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유람선을 타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크루즈 코스가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오스만 제국의 두번째 왕궁으로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43 ~ 1856년에 걸쳐 석조 궁전으로 재건 되었다.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과 선명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방의 벽들을 보면 호화스런 생활과 화려함의 극치를 느길 수 있다.


궁은 세부분으로 나뉘는 데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졌던 공공빌딩과 왕좌가 있는 홀이 가운데 있고 홀 옆으로 하렘이 있다.

 궁에는 대략 250개가 넘는 방과 43개의 홀이 있으며 각 방의 실내장식을 각각 다른 분위기로 꾸미는 화려함을 보인다.

탁트인 홀에 매달린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은 헌상품으로

 무게는 4.5톤이며 750개의 촛불 챔프가 켜져 있다.

궁과 궁의 각방을 꾸미는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사실 이 궁은 오스만제국의 약화가 가속화 되어가는 시점에 서구화를 지향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할 목적으로,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건립 되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막대한 건축비는 왕궁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궁전 내의 시계는 9시 5 가리키고 있는데 공화제가 확립된 후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다가

1938년 11월 10 집무중에 죽었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성당은 마치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현재 성 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 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벽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1934
년 성 소피아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정식 명칭을 바꾸면서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는 75m X 70m 7,570 평방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히포드롬광장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 개의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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